TREND / NO.2 RAMEN
새로운 매운맛의 고민
라면
불닭볶음면으로 ‘후끈’ 달아오른 유투브

“세상에! 한국 사람들은 이걸 왜 먹는 거야?” ‘영국 남자' 영상에 등장한 젊은이들이 면발을 한 젓가락 들이킨 후 몇 초도 안 돼 비명을 지르며 애타게 우유를 찾는다. “다 먹었는데도 계속 매워진다.”며 매운맛에 혼쭐 난 영국인들의 반응을 담은 이 영상은 2014년 유투브 선정 국내 인기 순위에서 6위를 차지했다. 주인공은 다름 아닌 ‘불닭볶음면'. 이렇게 외국인의 시선으로도 조망될 만큼 인스턴트 라면은 명실상부한 한국 대표 음식 중 하나다.

뉴욕 타임즈는 인스턴트 라면에 대해 “끓일 물만 있으면 신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 사람에게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면 평생 먹을 수 있지만, 라면을 주면 그 무엇도 가르쳐 줄 필요 없이 평생 먹을 수 있다."라고 평했다. 라면 최대 소비국은 연간 408억 개를 먹는 중국이지만 1인당 소비는 연간 74개로 한국이 세계 1위다. 인스턴트 라면의 시초인 일본에서도 한국 라면이 인기를 얻고 있는바, 현재 한국은 인스턴트 라면 종주국으로 자리 잡았다. 다른 곳에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완벽한 한국 음식으로 탈바꿈한 라면, 그 맛의 비밀을 파헤쳐보자.

초기 일본의 인스턴트 라면은 특유의 달고 느끼한 맛 때문에 환영받지 못했다.
빨간 국물로 탄생한 한국식 라면

한국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은 1963년, 삼양라면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곡식 위주의 식생활을 하던 한국인들에게 라면은 홀대를 받았다. 그러다 식량문제에 관심을 갖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혼분식 장려 정책(쌀 소비를 줄이고 밀가루 음식을 장려했던 운동)과 ‘매운맛' 컨셉 마케팅에 힘입어 기존의 하얗고 담백한 일본식 국물과 전혀 다른 한국식 라면이 탄생하게 된다. 삼양사는 맵고 짭짤한 닭육수맛의 라면으로 6년간 300배가 넘는 매출 증가를 거뒀고 이에 다른 식품회사들도 앞다투어 라면 생산에 착수했다.

매운맛 라면의 성장은 1970년대 고추 소비량의 증가와 맥락을 같이 했다. 품종 개량으로 고추 생산이 늘어나 전 국민이 모든 음식에 고추를 넣어 먹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라면에도 매운맛 DNA가 전파된다. 농심, 야쿠르트 등도 라면 사업에 진출하면서 한국인이 접하기 쉬운 부대찌개, 소고기 해장국, 된장찌개 기반의 얼큰한 매운맛을 출시했다. 이러한 맛과 향을 내기 위해 쓴 MSG 조미료가 건강에 해롭다는 이슈도 떠올랐지만, 이미 개운한 감칠맛에 길들여진 일부 한국인들은 조미료를 ‘한국적인 맛'이라며 옹호하기도 했다.

NO 국물 & 진짜 위에 가짜?

이후 라면은 고급화, 다양화의 길을 걸으며 기존의 ‘탕' 중심을 벗어나 새로운 스타일의 트렌드를 형성했다. 1970년에 판매된 ‘짜장면'은 당시 외식으로 즐겨 먹던 짜장면을 즉석에서 먹을 수 있도록 개발해 청소년층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이후 농심의 ‘짜파게티'가 1984년 출시되면서 짜장 라면의 트레이드 마크로 자리 잡게 된다. 춘장을 분말화해서 만든 제품이지만 중국집의 짜장면과 묘하게 다른, 단맛과 신맛이 조화를 이루는 독자적인 맛으로 유명해졌다.

짜파게티와 같은 해에 나온 ‘팔도 비빔면' 역시 한국 라면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대목이다. 팔도 비빔면은 비빔냉면인 함흥냉면을 모티브로 해서 개발된 것으로 ‘왼손으로 비비고 오른손으로 비비고'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냈다. 달면서도 새콤한 맛 덕분에 기존 라면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기도 했다. 비빔면의 시작은 이후 ‘탈(脫) 탕’ 라면계의 시초가 되어 스파게티, 쫄면, 불닭볶음면 등 다양한 스타일로 파생되고 있다.

현재의 라면 트렌드는 ‘프리미엄'과 ‘외식 카피'로 요약할 수 있다. 둘 다 오랜 경기 불황으로 작은 단위의 사치를 통해 자신에게 보상을 주려는 심리가 확산된 결과다. 여기에 먹방, 쿡방 등 다양한 음식 콘텐츠의 영향으로 라면도 미식을 추구하려는 욕구가 일어났다. 최근 상반기에만 5,000만 개 매출을 올리며 부동의 제왕 신라면을 누른 ‘짜왕' 역시 이러한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 고온 쿠커로 볶은 간짜장 맛 컨셉과 풍성한 재료 등이 포미(For Me)족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고급 한우 베이스를 썼다는 한우특뿔면, 하얗고 얼큰한 나가사키 짬뽕 맛의 꼬꼬면 등도 외식 대비 저렴하게 맛을 즐기고 싶은 니즈를 충족시키려는 차원에서 개발된 상품군이다. 애초에 끼니를 대체하는 ‘대용식'이라는 개념으로 출발한 라면의 속성은 위와 같은 다양한 음식의 맛과 성격을 카피하는 데 적합했고, 소비자들도 이를 거부감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오늘날, 라면의 모습은 진짜를 모방하지만 맛은 전혀 새로운 ‘제3의 음식’으로 진화하는 중이다.

문제는 ‘짠맛 + 매운맛’의 무조건적 팽창

이처럼 다양한 장르의 라면이 등장해도 맵고 짠맛의 국물 라면은 한국인들의 No.1이다. 심지어 세계적인 라면 리뷰 사이트 ‘라멘레이터’(www.ramenrater.com)에서 올린 2015년 매운맛 라면 TOP10 중 무려 여섯 제품이 한국산이다. 하지만 기존의 매운맛을 무조건 밀어붙이는 흐름이 맞는 걸까? 인스턴트 라면의 시장 특성상, 익숙한 맛을 추구하는 점은 이해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매운맛 라면을 보완하는 작업들이 더 ‘극단적인 자극’으로 가는 방향성에는 물음표를 던지게 된다. 매운맛도 종류에 따라 고추냉이나 마늘, 양파 같은 휘발성 매운맛과 고추, 생강 등에서 나오는 비휘발성 매운맛으로 구분되어 각기 다른 맛과 향을 즐길 수 있다. 똠얌꿍 역시 단맛, 신맛이 결합된 매운맛이지만 한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음식이다.

현재의 라면은 매운맛과 짠맛의 과부하라고 볼 수 있다. 매운맛 때문에 짠맛에 점점 무뎌지는 한국 사회의 ‘공통 미각'은 신체적, 정서적으로 큰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소화기를 망치는 지름길일 뿐 아니라 미각 경험이 극단적으로 획일화되기 때문이다. 오랜 역사 속에서 쌓아온 매운맛의 오리지널리티를 버리긴 힘들겠지만, 지속적으로 매운맛의 다양성을 넓히는 것이 앞으로의 숙제일 것이다. 그래야 라면도 더 폭넓은 음식으로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다. 이미 많은 한국인들이 태국이나 멕시코 음식을 통해 다양한 매운맛을 즐기고 있고, 이는 충분히 라면에서도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는 지점이다.

한국 라면의 역사는 맵고 짠맛의 누적 그 자체다. 코엑스 라면 박람회에 참가한 농심 부스.

물론 지금까지 이어져 온 매운맛 취향에 딴지를 걸고 싶진 않다. 혹자는 진정한 ‘한국식 스파이스'라고 예찬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닭볶음면이 1020의 젊은 세대에게 폭발적인 호응을 받았다는 뉴스를 들으면 마음 한구석이 씁쓸하다. 어릴 때부터 스트레스와 억압에 시달리고, 캡사이신 범벅의 라면을 먹으며 욕을 배설할 수밖에 없는 풍경. 놀랍게도 ‘매움의 과학'(The science of spiciness)이라는 TED 강연에서 과학자 로즈 에벌리스는 실제로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느끼는 고통의 차이가 없다고 밝혔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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