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 NO.1
집밥 남녀
1인 가구, 오포 세대, 열정 페이
현재의 젊은 세대에게 붙여진 단어들이다.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 교수는 경쟁에 승리하기 위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시간과 노동력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현재를 신경증의 시대로 정의했다.
시간과 관계의 결핍은 우리를 ‘삼시 외식'으로 밀어붙였고
집밥은 더욱 간절하고 그리운 이데아가 되었다.
지금 우리 일상에 놓여있는 솔직한 집밥은 무엇일까?
36.5˚C의 밥
자취 3년차, 혼자 먹으면 체하는 女

먹는 것이, 먹어야만 한다는 것이 서글퍼지는 순간이 있다. 음식물을 씹는 소리가 방안 가득 울려 퍼질 때 가만히 이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내가 음식을 먹고 있는 건지 혹은 허기가 빚어낸 무분별한 식욕을 어르고 달래고 있는 건지 헷갈린다. 여차여차 포만감을 얻고 나면 나는 한숨을 돌리지만 이내 한숨을 푹, 내쉬고 만다. 여전히 내 몸 어딘가에 머무르는 허기를 완전히 떨쳐내는 데는 실패했기에.

나의 집밥은 이처럼 늘 공허하고 불완전하다. 사랑이 부재한 섹스처럼.

나는 무엇을 먹고 무엇을 먹지 못했을까. 그전에 먼저, 먹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단지 생존을 위해 먹는 것이라면 내가 인간답게 식(食)을 영위하고 있는 것 같진 않다. 예능 프로그램이 나오는 노트북 앞에서 허겁지겁 혼자 밥을 삼키다 보면 성욕 해소를 향해 모니터 앞에서 내달리는 아무개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더는 이렇게 식욕을 해결하면 안 될 것 같은 위기의식이 든다.

스테이크가 맛있는 레스토랑에 간 적이 있다. 맛있는 걸 먹으니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당연히 ‘맛있다!’였다. 그러나 곧 이 맛있는 걸 함께 나누고 싶은 ‘사람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먼 타지에 있어 자주 보지 못하는 부모님이 생각났고 군에 가 있는 동생이 생각났다. 내가 힘들 때 나보다 먼저 울어주던 부산의 친한 언니들도. 그렇다. 나의 집밥이 사료에서 밥으로 승격되는 데 필요한 것은 사람이었다. 씹는 행위를 삶의 소중한 한 조각으로 승화시켜줄 사람.

내가 정의하는 ‘집밥’은 집이라는 공간에 갇혀 있지 않다. 집밥이 단지 공간에 머물러 있는 정의라면 소셜 다이닝 같은 건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소셜 다이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집에서 밥을 먹고 싶은 게 아니라 혼자 밥을 먹기 싫어서 모이는 거니까. 따라서 내가 여태껏 집에서 홀로 밥알을 씹었던 행위를 집밥이라 부를 수는 없을 것 같다. 대신 끼니때마다 찾아오는 성가신 욕구를 무미건조하게 처리하는 혼밥(혼자 먹는 밥의 줄임말)이라 칭하고 싶다.

식탁 위에는 반찬만 오고 가는 것이 아니다. 대화가 오가고 정이 오간다. 밥을 매개로 한 사람과의 교감이야말로 삶을 살찌우는 찬이다. 내 몸 어딘가에 머물렀던 허기는 교감이라는 찬으로만 채울 수 있다. 교감이 있다면 집밥은 집 외의 공간일지라도 얼마든지 구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감하는 동안에는 음식물 씹는 소리를 의식할 수 없을 터이니.

나는 현재 교감이란 찬이 절실하다. ‘집밥’이란 키워드에 열광하는 이 시대 역시 교감에 꽤 굶주려 있는 것 같아 서글픈 마음이 든다.

행복을 다루는 기술, 집밥
인스턴트 홀릭, 7년 차 요리고자男

월요일은 햇반과 맛김, 화요일은 라면에 참치캔, 수요일은 3분 카레, 그리고 주말까지는 새로 산 스팸을 기존의 식단과 재조합하는 ‘생존 자취 로테이션’. 복학생 시절, 나에게 집밥은 생존이었다. 나아가 1인 가구 직장인으로서 가성비를 생각해야 했고, 인스턴트 외식 역시 선택의 여지가 없는 대안이었다. 하지만 편의점 식사로 맛과 영양을 잡기는 힘들었다. 그렇게 내 집밥은 어떤 즐거움도 없는 무미건조 그 자체였다.

또 다른 문제는 시간의 부재다. 집에서 여유롭게 저녁을 먹는 계획은 야근, 모임, 사람들과 부대끼는 소셜 과부하 앞에 무릎을 꿇곤 했다. 퇴근 후 집에 들어와 요리 노동을 감내할 여력은 없고, 그 난관을 넘더라도 맛있을 확률은 희박하다. 때문에 식재료를 사서 맛난 요리를 해먹는 일상은 더더욱 불가능한 유토피아로 다가왔다.

하지만 식탁에 쌓여가는 컵라면 용기와 배달 치킨 박스를 보며 ‘오 마이 갓!'을 외친 나는 결국 집밥 프로젝트에 도전하기로 했다. 기간은 한 달, 모토는 쉽고 간단히, 요리는 최대 30분 안으로. 처음에는 실패투성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제법 먹을만한 음식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요리에 대한 재미, 그리고 ‘내 입맛’을 재발견할 수 있었다. 매실청을 넣고 파를 볶은 것만으로 전혀 새로운 제육볶음이 탄생하다니! 밖에서는 자극적인 음식을 즐기고 쿡방에서 설탕과 버터를 듬뿍 넣는 것을 보며 군침을 흘렸던 나인데, 오히려 미역이나 채소처럼 심심하고 아삭한 식감을 즐기고 있었다. 어느새 식탁은 한 달 전과 달리 담백하고 깔끔한 밥상으로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밥 해먹기를 반복하며 한 달이 지나갈 무렵, 모처럼 어머니가 자취방에 찾아오셨고 처음으로 내가 ‘내 밥’을 차려 마주 앉았다. “너 명란 원래 싫어하지 않았니? 시금치도 그렇고… 이런 거 좋아하는 줄 몰랐네. 우리 아들이.” 이 음식은 이런 일 때문에 좋아하게 되었고요, 이건 이래서 잘 안 먹게 됐어요 등을 이야기하며 자연스레 그동안 묵혀온 이야기들이 오갔다. 비록 작은 한 끼였지만 평생 나를 먹이고 길러온 어머니에게 처음으로 내 손으로 만든 밥을 대접하고, 그 밥이 나와 어머니를 조금 더 가깝게 이어줬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거친 ‘집밥 실험'은 마무리되었다. 그동안 차린 밥상들을 떠올리면 설탕을 잔뜩 넣은 요리는 실격이라느니,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음식이라느니 등 세간에 떠도는 ‘집밥 담론’과 연관된 적은 없었다. 오히려 먹방, 쿡방처럼 미디어를 통해 과대 포장되고 소비되었던 단어였지 정작 내 삶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집밥은 말 그대로 ‘집에서 먹는 밥'이다. 집처럼 가장 편하고 스스로 요리라는 노동을 통해 원초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밥. 그래서 집밥을 만드는 행위는 삶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에서 행복의 크기를 늘려가는 작업이다.

집밥 실험 이후, 내 일상에 큰 변화는 없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외식 라이프도 다시 시작됐다. 대신 서점에서 쉬운 요리책 한 권을 사고, 일주일에 한 번 마트에서 장을 보는 스스로와의 약속을 했다. 조금이나마 요리를 곁에 둬서 집밥이 준 그 행복의 감각을 잊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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