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COHOL / NO.10 BEER
‘한국 크래프트 맥주’를 만든다는 것

IPA, 페일 에일, 필스너, 헤페바이젠… 불과 2-3년 전만 해도 들어본 적 없는 생소한 단어들이다. 하지만 지금은 경리단길이나 강남, 대학가 곳곳에서 ‘수제 맥주' 간판을 단 펍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전까지의 한국 맥주는 오직 탄산과 풍미 제로인 ‘국맥'뿐이었다. 대기업의 맥주 시장 독점으로 전 국민이 라이트, 페일 라거만 맥주라는 착각 속에 살아왔던 것이다. 치맥이라는 독특한 페어링 문화가 발전한 것도 맥주 본연의 맛보다는 고소하고 기름진 치킨 맛을 깔끔하게 받쳐줄 보완재로서 맥주가 소비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씩 크래프트 맥주를 들여오는 펍이나 브루어리들 덕분에 다양성의 숨통이 트이면서 맥주 맛 자체를 즐기는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맥덕’들의 전유물이었던 홈브루잉을 가르치는 모임도 늘어나고, 자체적으로 맥주를 생산하는 소규모 브루어리들도 속속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독립과 개성, 그리고 혁신을 중요시하는 ‘크래프트 정신’처럼 그 지역의 특색과 전통이 담긴 맥주가 한국에서도 싹 틔우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한국적인, 한국만의 색깔을 담은 크래프트 맥주란 무엇인가. 본디 맥주는 수메르와 이집트 문명의 농경 생활에서 시작된 서양 문명의 음식이다. 때문에 맥주의 맛을 표현하는 정서와 언어는 서양 중심으로 맞춰질 수밖에 없다. 스파이시(Spicy)하거나 우디(Woody)하다는 맛의 표현을 동양 문화권에서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까? 반대로 처음에는 아카시아 향이 퍼지면서 복분자같이 달착지근한 맛이 입안을 맴돌고 마늘의 매콤한 여운이 남는, 우리의 맥락과 개성을 갖춘 맥주를 상상해볼 순 없을까.

브루어리 건물에 새겨진 문구, 고집스런 맥주 장인의 면모를 느낄 수 있다.
시골 양조장에서 코스믹 댄서를 빚다

충청북도 음성에 위치한 코리아 크래프트 브루어리. 한국 크래프트 맥주의 답을 찾기 위해 방문한 이곳의 매니저는 대뜸 ‘코스믹 댄서'라는 맥주 한 잔을 건넸다. 마침 갈증이 심한 터라 단숨에 들이키는 순간, 상큼한 귤 향과 호피한 맛이 목에 낀 더위를 말끔히 씻어 내주는 기분! 밤하늘에 맥주를 마시며 춤추는 사람의 이미지를 떠올려 만든 맥주라는 설명을 들으며 본격적으로 브루어리를 돌아봤다.

먼저 음성이라는 지리적 위치와 크래프트 맥주와의 연관성은 무엇일까? 첫 번째는 물의 중립성. 물의 성질이 한쪽으로 치우치면 다양하면서도 질 좋은 맥주 생산이 어렵다. 산도나 알칼리 속성이 강하지 않아야 맥아와 홉, 첨가물이 온전하게 발효돼 의도한 맛을 끌어낼 수 있다. 두 번째는 식자재의 다양성이다. 음성 지역은 여러 농산물을 구하기 쉬운 지리적 이점 때문에 수박이나 복숭아, 인삼 등 맥주에 접붙일 수 있는 식재료가 많다. 지역 농가와의 연결 네트워크도 풍부하다. 음성은 지역 재료로 건강한 맥주를 만드는 크래프트 맥주의 기본 정신에 최적의 장소라 할 수 있다.

드라이,핫,콜드 존으로 나뉘어지는 양조장 내부. 정교한 설비들은 경건함마저 들게 한다.

붉은색과 검정이 어우러진 미술관 같은 건물 안에서는 정교하고 복잡한 파이프라인 및 탱크들이 힘차게 가동 중이었다. 엔지니어링은 맥주를 만드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다. 살균과 온도의 조절을 통해 최적의 발효가 일어나도록 정교함을 요구하는 술이 맥주이기 때문이다. 물론 설비가 잘 갖춰져 있다고 무조건 맛있는 맥주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개성 있는 재료 배합으로 독특한 맛에 치중한 나머지, 일관된 스타일을 유지하지 못하는 브루어리들이 종종 생기곤 한다. 기분 좋게 마셨던 첫 기억과 달리 전혀 다른 맛이 나온다면 다음에도 그 맥주를 찾게 될까? 만드는 과정에서 잡균이 들어가면 아무리 재료가 훌륭하더라도 도로아미타불이 되기 마련. 균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모든 공정이 파이프라인 내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맛의 밸런스는 항상 일정하게 유지된다.

건조된 홉과 맥아의 모습. 맥주의 응축된 맛을 품은 씨앗과도 같다.
한국적인 맛의 고민

2층의 브루잉 랩에 들어가니 오미자, 복분자, 마늘, 유자 껍질 등의 다양한 재료들이 있었고 각종 플라스크 및 비커에서는 효모 실험이 한창이었다. 연구원의 실험실을 방불케 하는 이곳에서 ‘한국 크래프트 맥주'의 가능성이 잉태된다. 특히 효모의 선택과 관리는 맥주의 풍미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다. 브루마스터인 마크 헤이먼은 애플의 개발자로 근무했던 이력의 공학도로서 건강하고 다양한 이스트를 키우기 위해서는 정밀한 실험이 필수라고 강조했다.

그가 브루어로서 제일 관심을 두는 주제는 ‘한국적인 크래프트 맥주' 다. 이번 여름에 음성에서 나는 복숭아로 ‘피치 비어'를 만들려고 시도했는데 안정화 작업이 덜 되었다며 아쉬워했다. 피치 비어는 벨기에의 로컬 맥주 ‘람빅'의 일종인데, 자극적인 신맛과 달콤한 복숭아 향이 매혹적이다. 전 세계에서 피치 비어를 생산하는 브루어리는 단 12곳뿐. 마크 헤이먼은 맥주에 한국 복숭아만의 풍미를 담게 된다면 아시아를 대표하는 피치 비어가 될 거라고 말했다.

그는 한식을 단순하지만 풍부한 맛을 자랑하는 퀴진으로 정의한다. 때문에 맥주에도 강렬한 풍미와 복잡함이 조화를 이루는 한국적 미각을 더하고 싶은 바람을 밝혔다. 또한, 외국인의 입장에서 굉장히 독특한 식재료 중 하나로 오미자를 꼽았다. 오미자 같은 경우, 향과 색깔이 독특해 컬러를 살리는 데 집중하는 맥주를 개발 중이다. 홉도 내년에는 직거래가 가능한 국내 생산 농가에서 공급받을 예정이다. 나중에는 강원도에서 나는 보리로 맥아를 만들고, 충청도의 밭두렁에서 수확한 홉을 섞은 한국 맥주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카테고리 맥주의 굴레를 벗다

코리아 크래프트 브루어리의 또 다른 특징은 맥주를 카테고리로 규정하지 않는 것. 대부분 맥주는 몰트와 홉, 발효 방식, 재료의 차이에 따라 다양한 아로마와 맛을 낸다. 때문에 몰트의 풍미가 얼마나 강한지, 쓴맛은 어느 정도인지 등에 따라 위와 같은 카테고리로 나뉜다. 우리가 마시는 수제 맥주들 역시 카테고리의 스타일을 그대로 가져온 이름을 쓰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다양한 종류를 구분하기 위한 카테고리가 맥주의 이름으로 혼용되는 현상이다.

물론 외국에서도 에일 혹은 라거와 같은 카테고리를 맥주 이름에 덧붙여 쓴다. 심지어 카테고리와 지역명만으로 표기하는 곳도 많다. 맥주의 역사와 문화를 고려하면 카테고리의 특징이 워낙 강해 사람들의 머릿속에 그대로 인식되는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계속 카테고리로 이름을 부르다 보면 해당 맥주의 독특한 맛과 개성을 기억하기 어렵다. 마치 16GB, 32GB 같은 성능의 구분만 남고 다양한 컴퓨터 제조사의 특징은 매몰되는 것처럼.

아크 비어의 Be High(왼쪽)와 Hug Me(오른쪽)

브루어리의 시그니처 맥주인 허그미(Hug Me)와 비하이(Be High) 역시 이런 이름이 없었다면 수많은 벨지안 화이트 에일, 인디아 페일 에일 중의 하나로 묻혔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생강, 제주 감귤의 풍미를 강조하기 위해 참신한 네이밍을 택한 것에서 한국 맥주의 독자성을 찾으려는 이들의 철학을 엿볼 수 있었다. 복분자나 나물 같은 고유의 식재료가 ‘크래프트 정신’이라는 발효를 거칠 때 한국 크래프트 맥주의 정체성을 확장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침 제주 모던타임이나 아키투 브루잉 등 타 브루어리에서도 동백, 달맞이 같은 네이밍의 브랜드 맥주를 생산하고 있으니 반가운 일이다.

브루어리 문을 나설 무렵, ‘당신의 맥주는 무엇입니까?’라고 유리창에 새겨진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똑같은 사람, 똑같은 취향이 없듯 다양하면서도 뚜렷한 개성을 추구하는 철학. 그 속에서 한국 크래프트 맥주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사람들을 보며 ‘한국의 맥주는 무엇입니까?’라는 문장이 겹쳐졌다. 평범한 시골 한 자락, 묵묵히 자연에 귀 기울이며 맥즙을 발효시키는 그들의 모습은 장독대를 바라보며 인고의 정성으로 장을 담그는 한국의 장인들과 닮아 있었다.

브루마스터 ‘마크 헤이먼(Mark Hamon)’ 인터뷰
Q. 한국 맥주를 마셔보았는가? 어떠한가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Light flavor다. 맥주를 만드는 입장에서 하이트나 카스는 굉장히 가볍고 톡 쏘는 맛이 강하다. 하지만 그런 스타일은 꾸준히 만들기 어려운 프로세스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조금만 기복이 생겨도 일정한 맛을 유지하기 힘든데 그런 점에서 나쁜 맥주는 아니다. 원액 비교 테이스팅을 할 때 카스나 하이트에 타서 테스트하기도 한다.

사람과 국가, 문화별로 선호하는 맥주가 다르다. 예를 들면 독일에서 제일 좋은 맥주는 축구를 보면서 계속 마셔도 질리지 않는 맥주다. 그럴 땐 라이트한 맥주가 안성맞춤. 아로마, 목 넘김의 선호는 또 다른 측면이다.
Q. 양조 단계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은?
모든 단계가 중요하다. 제일 중요한 것은 질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한 관리이다. 브루어 마스터는 자신이 만드는 맥주의 모든 풍미를 정확히 의도하여 이를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어쩌다 더 좋은 맛의 맥주가 양조 되었다고 해도, 우연이 만들어내는 변화란 결국 실수다.
Q. 현재 실험 중이거나 관심 두는 재료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일단 오미자와 제주 감귤 껍질, 고흥 유자도 있다. 재료를 맥주에 첨가하는 방법도 실험을 통해 최적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껍질을 말리거나 즙을 내거나, 혹은 우려서 넣기도 한다. 새로운 타입의 과일이나 채소를 넣으려면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지금 실험 중인 갈릭 비어의 경우도 마늘을 푹 넣거나 액을 우려내는 것만이 아닌, 여러 방법을 찾고 있다.

우리 브루어리의 맥주 브랜드의 아크(ARK)는 방주를 뜻한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노아의 방주가 지상의 모든 종을 담는 그릇이었던 것처럼, 우리도 다채로운 스타일의 맥주들을 생산하는 ‘다양성’을 품고 있다. 그러면서 한국만의 색깔을 지닌 맥주들의 폭을 넓히고 싶다. 우선 전통 식재료로 여러 실험을 계속할 것이다. 한국의 보리로 몰트를 생산할 수 있다는 점 또한 흥미롭다. 아직 다양한 변주는 무리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Q. 브루어 마스터로서 맥주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오늘 만들 맥주를 망치지 않는 것. 단순해 보이지만 사실이다. (웃음) 나는 이스트에게 훌륭한 맥즙을 제공하려 애쓰는 요리사이자 브루어리의 관리인이다. 재료 수급, 청소 등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는 일들을 가장 세심하게 관리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믿는다. 이러한 노력이 맥주 맛의 일관성을 지켜나가는 뿌리가 되기 때문이다.
연관 컨텐츠